신인상주의의 창시자 조르주 쇠라 (1859 ~ 1891)
피에르 조르주 쇠라는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법률 관련 공무원이었고 어머니 또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이미 집안의 대를 이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쇠라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쇠라는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조각, 소묘 시립학교에서 조각가 쥐스탱 르키앙에게 사사했고 에콜 드 보자르에서는 영사 및 초상화 화가 앙리 레만으로부터 미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서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림 못지않게 책 읽는 것도 즐겨해서 [색채의 동시 대조 법칙(1873)]이나 [근대 색채학(1879)] 등의 책을 읽으며 색채 이론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1879년에 개최된 인상파 전시회를 보고 모네, 드가. 피사로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뒤 학교를 나와 홀로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책을 통해 색채 이론을 익혔으며 과거 들라크루아나 밀레, 쿠르베 등의 표현 기법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하였습니다.
1883년 어머니의 친구인 아망 장의 초상을 살롱전에 출품하여 처음으로 입선을 하고 명암 배합이 뛰어나며 초보자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렵다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그동안 모든 학습을 정리하여 물감을 묻힌 작은 점 또는 붓질을 활용해 그림을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아스니에르의 해수욕 (1883~4)]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살롱전에 낙선하자 그는 젊은 화가들과 독립 예술가 협회를 결성하여 첫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폴 시냑, 피사로 등을 만나 신인상주의의 탄생에 일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에 걸쳐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려냅니다.
이후 젊은 모델인 마들렌 크노블로흐와 동거를 하며 아들 피에르도 가지게 되었는데 부인과 아들을 부모에게 소개하고 결혼을 하기로 한지 2일도 안되어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마들렌은 둘째 아들도 출산을 했으나 아기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쇠라는 사망하기 전 그의 그림을 그리는 방식 때문에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전해지며 마지막 유작인 [서커스]를 그리다가 작품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수막염이나 폐렴, 디프테리아 중 하나가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완성하기까지 2년 이상이 걸린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쇠라의 대표작인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1886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3m에 이르는 이 대작을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동안 그는 매일 아침마다 스케치북을 가지고 해변에 나가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스케치하고 오후에 작업실로 돌아와 그들의 모습을 화면에 다양하게 배치를 했습니다.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린 소묘 작품이 스무 장 정도 그리고 채색까지 한 초안 작품은 40장 정도가 있는데 이를 보면 그가 사람들의 자세나 모습뿐 아니라 당시의 복식도 열심히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은 파리 서북구 세느강변에 위치한 그랑자트 섬의 한가로운 주말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한낮의 햇볕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그늘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햇빛을 가리기 위한 양산이나 모자를 쓰고 있으며 멀리 수상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주말의 한때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신인상주의의 시대를 열다
놀라운 점은 이 그림 속에서 밝은 곳과 어두운 곳, 맑고 푸른 물 그리고 4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면 모두 혼합하지 않은 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의 작은 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고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를 통해 인상주의의 빛에 대한 해석을 충실히 따르면서 인상주의가 소홀히 여겼던 조형적 질서를 바로 잡아 인상주의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은 신인상주의의 시대를 열어 준 작품으로 당시 미술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이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대한 그의 평론에서 처음으로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면을 채색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색채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고 광택의 정도를 더 나아지게 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쇠라는 이를 통해 인상주의 미술의 이론적 체계를 쌓기 시작했고 나아가 20세기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등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댓글